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환단고기/고증적 비판 (문단 편집) === 시대와 맞지 않는 사회상 묘사 === >각 시대의 사회 상태는 우리 대에서 각 분야의 자료에 의해서 항상 그 개략적인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만약 아무 책에서 그 시대 상황을 말한 것이 사리에 있어 너무 차이가 나는 것이라면 바로 거짓이라고 단정할 수 있다. >---- >'''[[량치차오]](梁啓超), 『중국역사연구법』''' 이와 같은 제도적인 측면과 표리를 이루는 것이 바로 당대의 사회구조, 즉 통치와 생활의 중심이었던 각 읍락 내부의 사회적 모습이다. 물론 단군시대 당시의 사회적 모습이 어떠하였는지를 직접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문헌은 오늘날 존재하지 않지만, 대신 환단고기에서 '''상대적으로 봉건세력의 활동이 제약'''되고 '''군현제가 보편화'''되었던 것으로 기술한 기원전 8~7세기인 30세 단군나휴(기원전 909~기원전 875)부터 35세 단군사벌(기원전 772~기원전 705)까지의 기간이 여기에 해당한다. 환단고기에 따르면 이 시기는 단군색불루가 조선의 제도를 정비한 이래 줄곧 태평성대가 이어진 기간이었다. 중국의 주나라·초나라와 북방의 흉노족·선비족이 모두 단군조선에 조공을 바치고 뒷산에는 [[봉황]], 앞뜰에는 [[기린]]이 뛰노는 가운데 백성들은 도리가를 지어 부르며 단군조선을 찬양했다 한다. 다만 단군사벌의 말년에 들어 일본으로 원정군이 출정하고 중국의 연나라 및 제나라와 전쟁을 벌이는 등 조금씩 갈등이 시작되었다. 더욱이 이 뒤로 기원전 6세기 중반부터 4세기 전반까지는 근 200년간의 암흑기가 펼쳐진다. 그 뒤로는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다 멸망한다. 당연히 실제 고고학적인 연구결과와는 배치되는데 실제로는 기원전 6세기를 전후하여 중심지를 요서에서 요하 일대로 이동한 뒤로는 [[랴오닝 성]] 남반부와 [[지린 성]] 서부, [[평안도]] 일대에 산재해있던 소규모 부족국가들을 차례로 복속시킨 뒤에 기원전 4세기 말까지 패권을 장악하는것으로 나오기때문이다. 즉, 고조선이 한창 성장하던 [[전성기]]였다는 얘기이다. 비록 완전한 중앙집권화를 이룩한 수준은 아니지만 전국시대 당시에 '전국7웅' 으로 손꼽히던 [[연나라]]를 완전히 압도할 정도는 아니었어도 [[연역왕]]이 왕을 칭하자 같이 왕을 칭하거나 연나라를 정벌하려는 계획을 세울수있던것은 이러한 국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던것이었다.]의 청동기시대 사회구조를 현재까지 축적된 고고학적 정황을 통해 추적하고 환단고기의 내용과도 비교해 볼 수 있다.[* 이하 오강원, 「동북아시아 속의 한국 청동기문화권과 복합사회의 출현」, 15~28쪽 참고.]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ttachment/환단고기/BC8-7.jpg|width=100%]]}}}|| 위 지도에 표시된 한국 관련 청동기문화권(1~11)에서 기원전 8세기에 군장사회 단계에 도달한 것은 가장 서쪽에 있는 십이대영자 문화(1)밖에 없었다.[* 오강원, 「동북아시아 속의 한국 청동기문화권과 복합사회의 출현」, 14쪽, "군장사회는 수공업의 전문화와 사회적 위계화가 어느 정도 진행되었을 뿐 아니라 군장을 중심으로 한 엘리트 계층에 의해 일반 사회 성원들에 대한 사회경제적인 통제와 조절이 이루어지는 사회를 말한다. 따라서 이러한 단계에 도달한 사회에서는 __군장을 비롯한 엘리트 계층이 자신들의 권위를 현시하는 특수 유물을 전유(專有)__할 뿐만 아니라 일반 성원들과의 차별성을 드러내기 위해 __자신들의 가옥·무덤·공적 의사 결정의 장소·의례 공간 등을 공간적으로 구분__하기 마련이다."] 십이대영자의 대형 석곽묘군은 주위의 다른 중소형 고분들과 별도로 대릉하 근처 언덕 위에 독립적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그 안에는 청동검·청동거울·청동도끼 및 각종 위세품이 다량 부장되어 있는 것이다. 이는 주위의 다른 중소형 고분들이 피장자의 권위를 상징하는 위세품이 거의 부장되어 있지 않고, 있다 하더라도 단수로 소량 부장된 것과 대조적이다. 따라서 기원전 8세기에 십이대영자 문화는 전문적인 수공업과 사회적 위계화가 진행된 군장사회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 외의 지역들은 여전히 부족사회 단계에 머물러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여타 지역에서 청동기물의 발견은 아주 예외적인 경우에 한정되고, 그러한 청동기물이 발견된 고분이 입지상이나 크기상으로 다른 고분들과 구별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서단산 문화(6) 등에서 토기 및 석제 부장품의 다양화를 통해 전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사회경제적 불평등성이 심화되어가는 모습만을 확인할 수 있을 따름이다. 요동과 한반도에 널리 분포한 [[고인돌|거대 지석묘]]들도 이와 마찬가지로 생산물의 재분배와 집단의 공동 의식을 주재하는 지도자로서 발전된 부족장의 면모 정도만을 확인할 수 있을 따름이다. 이와 같은 십이대영자 문화(1)와 여타 지역들 사이의 사회 발전 격차는 기원전 6세기 중반에 대릉하 유역의 십이대영자 문화에서 일군의 집단이 요하를 건너 [[심양]]에 정가와자 유형을 형성하면서부터 비로소 좁혀지기 시작했다. 비슷한 시기 [[만주]]의 서단산 문화는 취락의 숫자와 규모가 비약적으로 증대되었지만 여전히 청동기물의 독점적 소유 등은 보이지 않다가 기원전 5세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다양한 청동기물의 소유 차등, 지배집단과 피지배집단 사이의 거주공간 분리 따위가 일어나게 된다. 비슷한 시기 한반도에서는 금강 유역에 간석기, 쌀농사, 환호취락, 송국리형 주거, 송국리형 토기로 특징되는 송국리 유형이 발전하였지만 기물이나 공간이 독점화된 모습을 찾아보기는 어렵고,[* 김경택, 「청동기시대 복합사회 등장에 관한 일 고찰: 송국리유적을 중심으로」, 19~20쪽.] 기원전 4~3세기 충청남도 일대의 남성리 유형이 정가와자 유형의 영향하에 군장사회로 발전한 모습을 보인다. 여기에서 고고학적인 증거들이 환단고기의 내용과 심하게 배치된다. 군현제가 처음으로 실시되었다는 기원전 17세기는 고사하고, 그로부터 천 년 가까이 지난 기원전 7세기에조차 만주와 한반도 일대에는 균질적인 영토라던가 통일적 집권국가가 형성되지 않았다. 더욱 심각한 것은 환단고기에서 당시 단군조선의 중심지라 주장하는 송화강 유역의 길림-하얼빈-영고탑 일대[* "그 뒤 호를 단군왕검이라 하는 분이 도읍을 아사달에 정하시니 지금의 송화강이라. 처음으로 나라를 칭하사 조선삼한이라 하니 고리 시라 고례 남북의 옥저 동북의 부여, 예와 맥은 그의 관경이었다.(태백일사 신시본기)" "단군조선이 도읍한 곳으로서 아사달이 그곳이니, 즉 지금의 송화강의 하르빈이다.(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가 그 부속국인 번한이 위치하고 있는 요서보다도, 아니 만주 일대에서 가장 정치적 경제적 통합이 미진한 후진지역이었다. ||<^|2>기원전 38세기||네 집이 정(井)을 함께하고, 20분의 1을 세금으로 냈다.|| ||본래 신시의 구정균전(邱井均田)의 유법(遺法)이었다.|| ||<^|1>기원전 2240||매 봄과 가을마다 국내(國中)를 순시하며 예로써 하늘에 제사지냈다.|| ||<^|1>기원전 2231||구정(邱井)을 긋고 전결(田結)을 삼아 백성들이 사사로운 이익을 취하지 못하게 했다.|| ||<^|1>기원전 2175||명하여 차등 있게 조세(租稅)를 감면하였다.|| ||<^|1>기원전 1994||20분의 1을 세금으로 내는 법을 정하였다.|| ||<^|1>기원전 1993||농지(田)를 나누어 땅을 주었다.|| ||<^|1>기원전 1990||단군이 미복하고 국경(國境)을 나가 하나라의 정세를 관찰하고 돌아왔다.|| ||<^|1>기원전 1833||단군이 국내(國中)를 순시하다 [[랴오허|요하]](遼河)의 좌안에 다다라서는 순수관경비(巡狩管境碑)를 세웠다.|| ||<^|1>기원전 1662||80분의 1을 세금으로 내도록 제도를 고쳤다.|| ||<^|1>기원전 1501||단군이 오가(五加)와 함께 국내(國中)를 순력하다 개사성(蓋斯城)의 경계에 다다랐다.|| ||<^|1>기원전 1286||단군이 국내(國中)를 순수하여 남으로 해성(海城)에 다다랐다.|| 더욱이 이러한 사회적 여건 위에서는 '나라'라는 개념 자체도 오늘날 우리의 생각과 분명한 차이가 존재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단적으로 춘추시대에는 나라의 중심에서 제후가 거주하는 중심적 읍을 가리켜 국(國)이라 불렀고, 교(郊) 밖으로 이러한 국을 둘러싸고 있는 광대한 원야를 가리켜 야(野)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 원야의 여기저기에 점점이 존재하는 소읍락이 비(鄙)이며,[* 사실 생활공간으로서 야(野)와 거주공간으로서 비(鄙)의 구분은 모호한 면이 있다. 비와 야를 동일시하는 것을 뒷받침하는 기록이 있는 반면에, 비와 야를 동일시할 수 없는 기록도 존재한다. 어찌되었든 둘은 교외라는 의미에서 일정하게 혼용되었던 듯하다.] 이밖에도 읍락의 성격이 국에 가까운 도(都)가 공족과 귀족의 채읍으로 존재하면서 주변의 비읍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리하여 성 안에 거주하는 지배집단은 국인(國人), 성 밖에 거주하는 피지배집단은 야인(野人) 또는 비인(鄙人)이라 불리게 되었던 것이다.[* 이성구, 「春秋戰國時代의 國家와 社會」, 『講座 中國史 I』, 95~96쪽.] 따라서 초기에 국(國)이라는 개념은 중층화된 읍락들의 정점에 있는 가장 크고 중요한 읍락을 가리킬 뿐, 일정한 선으로 존재하는 국경의 안이라던가 하다못해 '''지배력이 미치는 영역 전체를 가리키는 의미조차도 아니었다.''' 이는 생산력의 부족으로 말미암아 읍락의 외연에 존재하는 농지(野)와 농지(野) 사이에 광대한 규모의 미개간지, 일종의 공백지대가 존재하였고 이 때문에 읍락국가는 아직 영역국가로 발전할 수도, 발전할 필요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자연스럽게 일국의 속읍이 타국을 초월하여 존재할 정도로 이 시기 국경의 개념은 명확하지 않았고 오직 속읍의 영유권만 확보할 뿐이었다. 그런데 환단고기는 이러한 초기 국가의 사회상을 무시하고 '국(國)'이라는 글자를 명백하게 지배력이 미치는 일정한 경역을 가리켜 사용했다. 더군다나 토지세(田結·租稅)를 걷는다거나 백성들에게 농지를 분급했다는 데 대해서는 할 말이 없는 노릇이다. 토지에 세금을 물렸다는 것은 노역에 의해 공동경작하는 씨족공동체가 해체되어 사적 토지점유의 불균등이 발생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 안 그래도 미개간지가 유의미하게 널려 있는데 중국 따라한답시고 토지분급제를 실시했다가 철저히 시망한 사례가 있으니, 바로 다이카 개신 시대의 일본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